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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쓰이 사다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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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쓰이 사다쓰구는 1562년에 태어나 쓰쓰이 준케이의 양자가 되어 쓰쓰이 가문을 상속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딸과 결혼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활약하며 이가국 우에노를 영지로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했으나, 1608년 막부의 명령으로 개역되었고,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씨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자해했다. 그는 병법과 문예에 능했으며, 이가우에노 성 축성, 기리시탄 개종 등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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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쓰이 사다쓰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쓰쓰이 사다쓰구의 초상
쓰쓰이 사다쓰구의 초상
이름쓰쓰이 사다쓰구
본명筒井 定次
출생1562년 6월 6일
사망1615년 4월 2일
아버지쓰쓰이 준케이
관직
관위종5위 하 이가노카미, 종4위 하 시종
주군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리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영지이가우에노 번 번주
가문
씨족쓰쓰이 씨
아버지쓰쓰이 준쿠니(자묘지 준쿠니)
어머니: 쓰쓰이 준아키의 딸
양아버지: 쓰쓰이 준케이
형제쓰쓰이 겐바
배우자정실: 오다 히데코(오다 노부나가의 딸)
측실: 이치바 히메(아케치 미쓰히데의 딸)
자녀준사다, 하루쓰구(하루토시), 딸(구라타 구자에몬 실), 딸(쓰쓰이 로쿠자에몬 실), 딸(신조 나오우지 실), 딸(다다 마사요시 실), 딸(가노 부젠 실)
군사 경력
소속도요토미 씨
동군
도쿠가와 막부
지휘이가 우에노 성
참전 전투시코쿠 정벌 (1585년)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오사카 전투 (1615년)
쓰쓰이 가 당주
직책야마토 쓰쓰이 씨 종가 당주
임기1584년 ~ 1608년
전임쓰쓰이 준케이
후임쓰쓰이 조케이
이가 우에노 번 번주
직책이가 우에노 번 번주
임기1585년 ~ 1608년
후임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도요토미 씨의 내통을 의심 받고 할복. 단절에 따른 폐번
기타 정보
묘소나라현나라시 오가와정의 덴코지
통칭시로, 도시로
유년명후지마쓰

2. 생애

에이로쿠 5년(1562년) 5월 5일, 쓰쓰이 준코쿠(쓰쓰이 준케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촌이자 외삼촌인 쓰쓰이 준케이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준케이의 양자가 되었다.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승낙을 얻어 양자 후보로 반조 고로가 검토되었으나, 고로가 사퇴하여 사다쓰구가 양자가 되었다.[3]

덴쇼 6년(1578년) 3월, 오다 노부나가의 14번째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3]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어 오사카 성에 인질로 갔다. 1584년 준케이의 죽음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같은 해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했다.[4]

1585년 기슈 정벌에서는 호리 히데마사 등과 함께 센고쿠보리 성을 공격했다. 같은 해 시코쿠 정벌에서는 나카무라 가즈우지하치스카 마사카쓰와 함께 선봉을 맡아 도조 세키노에가 농성하는 기쓰 성을 공격했다. 같은 해 8월, 도야마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사사 나리마사가 격돌했지만, 사다쓰구는 시코쿠에 주둔 중이어서 참전하지 않고 우다중을 대리로 파견했다.[4]

같은 해 윤 8월, 히데요시는 대규모 영지 교체를 실시하여 사다쓰구는 야마토 국에서 이가 국 우에노로 영지를 옮겼다. 이가국으로의 영지 이전은 2만 석의 증가였다고 한다.[4][5] 이가 우에노 성을 축성하고,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성을 칭하는 것을 허락받았다.[4]

1586년, 관개 용수를 둘러싸고 시마 사콘과 다툼이 있었다. 마쓰쿠라 시게마사, 모리 요시타카, 후세 게이슌 등 유력 가신들도 쓰쓰이 가문을 떠났다.[4]

같은 해 규슈 정벌에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여 휴가 다카조 공격 등에서 활약했다. 1588년,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니라야마 성 공격에 참여했다. 1592년부터 분로쿠·게이초의 역에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여 히젠 나고야에 주둔했지만, 조선으로 건너가지는 않았다.[4]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았다.[1]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에도막부를 열자, 쓰쓰이 씨는 이가 일국을 지배하는 국지 다이묘가 되었다.[1]

1608년, 막부의 명령에 의해 개역되어 다이묘로서의 쓰쓰이 씨는 멸망했다(쓰쓰이 소동).[2] 이후 토리이 타다마사에게 맡겨졌다.[3]

1615년 3월 5일,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도요토미 씨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적자 쓰쓰이 노리사다와 함께 자결을 명받았다. 향년 54세.[4]

2. 1. 쓰쓰이 가문 상속

에이로쿠 5년(1562년) 5월 5일, 쓰쓰이 준코쿠(쓰쓰이 준케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촌이자 외삼촌인 쓰쓰이 준케이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준케이의 양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준케이의 양자 후보로 반조 고로가 검토되어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승낙도 얻었지만, 고로가 사퇴했기 때문에 사다쓰구가 양자가 되었다.[3]

덴쇼 6년(1578년) 3월, 오다 노부나가의 14번째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3] 아내의 이름은 히데코 또는 후지라고 하며, 이가 우에노로 이주한 후에는 우에노 고타이라고 칭했다.(『쓰쓰이 쇼키』, 『쓰쓰이 호케이』, 『증보 쓰쓰이가 기록』)[3] 사다쓰구 사후에는 니치에이라고 칭했다.(『계도찬요』오다 계도)[3]

2. 2. 도요토미 정권 시기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어 오사카 성에 인질로 갔다. 1584년 순경의 죽음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같은 해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 이 전투에서 사다쓰구의 가신 마쓰쿠라 시게노부가 분전하여 공을 인정받아 우근대부에 서임되었다.[4]

1585년 기슈 정벌에서는 호리 히데마사 등과 함께 센고쿠보리 성을 공격했다. 『회본 태합기』에는 이 성 공격에서 2자 7치의 태도를 휘두르며 분전하는 사다쓰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쓰쓰이 군은 분전했지만 그만큼 병력 소모도 컸다고 『다몬인 일기』는 언급하고 있다.[4]

같은 해 시코쿠 정벌에서는 나카무라 가즈우지하치스카 마사카쓰와 함께 선봉을 맡아 도조 세키노에가 농성하는 기쓰 성을 공격했다. 같은 해 8월, 히데요시와 사사 나리마사의 합전(도야마의 역)이 일어났지만 사다쓰구는 시코쿠에 주둔 중이었기 때문에 참전하지 않고 우다중을 대리로 파견했다.[4]

1585년 윤 8월, 히데요시는 영내의 대규모 영지 교체를 실시하여 기나이(畿内)는 하시바 일문과 측근으로 굳히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 영지 교체로 야마토 국에는 히데요시의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가 입국하고, 대신 사다쓰구는 영지를 야마토국에서 이가 국 우에노로 옮겨 봉해졌다.[4]

에도 시대 편찬물 『증보 통이 가하기』에는 사다쓰구는 이가 일국 12만 석, 이세 국 내 5만 석, 야마시로 국 내 3만 석을 합쳐 20만 석을 받았고, 한편, 이전의 야마토 44만 석 중에서 '''여력을 제외한 통이 씨의 순수한 영지'''는 18만 석이었으며, 이가국으로의 영지 이전은 2만 석의 가증이었다고 한다.[4][5] 또한 이가국은 간토에 대한 대비로서의 역할을 하는 가도의 요충지이며, 그러한 중요한 땅에 사다쓰구를 배치한 것은 히데요시가 사다쓰구를 평가하고 일정 이상의 신뢰를 보였다는 증거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4]

이가로의 영지 이전에 따라 사다쓰구는 이가 우에노 성을 축성했다. 또한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성을 사칭하는 것을 허락받아 종5위하 이가노카미에 임명되었다.[4]

1586년, 관개 용수를 둘러싸고 나카보 히데스케와 시마 사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사다쓰구가 히데스케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자 분개한 사콘이 쓰쓰이 가문을 떠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쓰쓰이 가문을 떠난 사콘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섬겼다. 마쓰쿠라 시게마사, 모리 요시타카, 후세 게이슌 등 유력 가신들도 앞뒤로 쓰쓰이 가문을 떠났다. 그 배경에는 히데스케 등의 대두와 전단이 있었다. 사다쓰구에게는 그들을 완전히 억제할 만한 역량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4]

같은 해 규슈 정벌에서는 이가 국의 유수를 짓치 신지로에게 맡기고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여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부대에 소속되어 휴가 다카조 공격 등에서 활약한다. 1588년,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니라야마 성 공격에 참여했다. 1592년부터의 분로쿠·게이초의 역에도 병력 3,000명을 이끌고 출진하여 히젠 나고야에 주둔하며, 조선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조선의 역 중 현저한 무공을 세운 가토 기요마사에게 칭찬 사자를 보낸 일이나, 나고야에서 주색에 빠져 나카보 히데스케를 우려하게 한 것 등이 『와슈 여러 장군 전』에 기술되어 있다. 동서의 기술에 따르면 사다쓰구는 병을 얻어 히데요시의 승낙을 받아 성에 주둔하는 도중 이가국으로 귀국했다.[4]

2. 3.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쓰쓰이 사다쓰구는 동군에 가담했다. 사다쓰구는 이복 형제인 쓰쓰이 겐반노죠를 성에 남겨두고 아이즈 정벌에 나섰지만, 그 사이에 성을 서군 측의 신조 나오요리, 나오사다 부자에게 빼앗겼다. 겐반노죠는 적병을 두려워하여 항복하고 고야산으로 도망쳤다. 이 사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귀에 들어가 사다쓰구는 되돌아와 타라오구치에서 이가국으로 들어갔다. 주군의 부름에 병사나 하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대군이 되었다. 신조 부자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사다쓰구의 적자를 인질로 화해하여 시마가하라에서 풀어주었다.[1] 그 후 사다쓰구는 세키가하라에 달려갔다. 전투 후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았고, 신조 부자는 개역되었다.

2. 4. 에도 막부 시기

1603년(게이초 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에도막부를 열자 쓰쓰이 씨는 이가 일국을 지배하는 국지 다이묘가 되었고, 사다쓰구는 이가노카미에 서임되었다.

1608년(게이초 13년), 사다쓰구의 중신인 나카보 히데스케가 사다쓰구의 악정과 사슴 사냥에서의 해이 등 불미스러운 행위를 고발하여, 사다쓰구는 막부의 명령에 의해 개역되었고, 이로써 다이묘로서의 쓰쓰이 씨는 멸망했다 (쓰쓰이 소동). 개역 이유에 대해서는, 오사카 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무가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연하 인사를 하러 가지 않고 막부에 대한 충성의 태도를 명확히 보여주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원래 도요토미 은고의 다이묘였고 이가국이라는 오사카의 근교에서 군사적인 요충지를 영유하고 있던 것을 막부에서 위험시했다[1]고 한다. 이 쓰쓰이 씨에서 도도 다카토라 씨로의 교체는 이에야스의 대 도요토미 정책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며, 도요토미 은고 다이묘인 쓰쓰이 씨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가신 간의 분쟁에 개입하여 쓰쓰이 씨를 개역시키고, 도요토미 은고 다이묘이면서 이에야스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도도 다카토라에게 이가를 준 것은, 오사카 측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하게 도쿠가와 측 세력을 상방 방면에 침투시키는, 이에야스의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2].

사다쓰구는 개역된 후, 토리이 타다마사에게 맡겨지게 되었다.[3]

1615년(게이초 20년) 3월 5일,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도요토미 씨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적자 쓰쓰이 노리사다와 함께 자해를 명받았다. 향년 54세. 할복을 명받은 경위에 대해, 『이야 안민기』, 『옹 이야기』는, 오사카 겨울 전투 때, 성 안에서 발사된 화살 중 하나에 쓰쓰이 가문에서 사용되던 것이 있었고, 그 화살이 내응의 암시를 의심하게 하여, 자해를 명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화살은 쓰쓰이 가문이 개역될 때 흩어진 것이 오사카 성에 섞여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4]. 『나라 방목 절해』는, 자해한 사다쓰구 부자의 유해를 덴코지의 주지가 다이안지에 장례하고, 덴코지에 석탑을 건립했다고 전한다.

이에야스에 의해 쓰쓰이 씨의 가독은 사다쓰구의 사촌 쓰쓰이 사다요시가 야마토 고리야마 성 1만 석을 받아 계승했지만,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 측에 야마토 고리야마 성을 함락당하고 (고리야마 성 전투), 전쟁 후에도 그대로 영지를 잃었다. 이로 인해 쓰쓰이 씨 자체가 소멸된 것처럼 적혀 있는 서적이 많지만, 사다쓰구 계통 이외의 다른 쓰쓰이 씨 일족은 도다이지주지나 봉행, 하타모토 등으로 존속하여, 현재까지 가문을 유지하고 있다 (사다요시의 동생인 게이유(준사이)의 자손이 1,000석의 하타모토가 되었고, 그 자손인 쓰쓰이 마사노리, 시모소네 노부아쓰 부자 등).

사다쓰구의 불미스러운 행위를 고발한 나카보 히데스케는 그 후, 막부에 발탁되어 나라 부교를 역임했다.

3. 인물 및 일화


  • 쓰쓰이 사다쓰구는 이가우에노 성 축성에 있어서 입지 조건과 지반을 고려하여 오사카를 지키는 성으로 적합한 장소를 선택했다. 산 정상에 혼마루, 서쪽에 니노마루, 북쪽 기슭에 산노마루를 둔 평산성의 근세 성곽을 쌓아, 도카이도에서 오는 도쿠가와 군을 감시·견제하고 격퇴하는 거점으로 삼았다.[6]
  • 분로쿠 원년(1592년)에 나가사키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기리시탄이었던 것이 개역 원인 중 하나라고도 한다.[7]
  • 이가의 쓸쓸한 빈촌이었던 우에노는 사다쓰구의 정비로 크게 발전했다. 그 때문에 지역에서는 사다쓰구를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
  • 문화면에도 정통하여 제례 진흥에 힘썼다. 다도를 즐겼으며 후루타 오리베와도 교류가 있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가야키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설도 있다.[7]
  • 『시바구리 소자』는 "병법의 달인이자, 문예에도 뛰어나, 필적은 손엔 친왕과도 필적하며, 화재는 셋슈를 방불케 하고, 노가쿠의 기교도 4좌의 다유에 뒤지지 않는다"고 평하고 있다.
  • 사다쓰구는 기독교에 입교했다. 세례일과 세례명은 불분명하지만 31세 때였다. 미카 만쇼라는 기리시탄을 숨겨주고 있었으며, 그의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덴쇼 20년(1592년), 미카 만쇼의 중재로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의 지우를 얻어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사다쓰구와 발리냐노의 면회에 동석했는데, 사다쓰구를 "인격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했으며, 고야마 우콘도 그의 인품을 평가했다고 프로이스의 기록에 언급되어 있다. 프로이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풍조가 있었음에도 사다쓰구는 이가에 기독교를 널리 포교할 의사가 있었다고 한다.

4. 전승

쓰쓰이 가일본어(筒家里)에 따르면, 사다쓰구의 차남인 하루토시(일반적으로는 하루쓰구라고 불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추격을 피해 분고 국 타후쿠 아리야스로 도망쳤다. 그 후 사사키 모리시게의 보호를 받아 농민이 되었고, 이름을 시게에몬으로 고쳤다. 쓰쓰이 가일본어에는 1960년까지의 당주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10]

고치현 오카와촌·이노정 모토가와에는 쓰쓰이 사다쓰구가 도망쳐 왔다는 전승과, 그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 쓰쓰이 성씨의 가문이 있으며, 1576년으로 추정되는 7월 4일자 오다 노부나가가 준케이에게 보낸 편지 등을 소지하고 있다.[10]

참조

[1] 웹사이트 Iga Ueno Castle homepage http://www.ict.ne.jp[...] 2002-04-09
[2] 웹사이트 Iga Ueno Castle homepage http://www.ict.ne.jp[...] 2002-04-09
[3] 간행물 織田信長の息女について 岩田書院
[4] 간행물 豊臣政権と筒井氏 - 「大和取次」伊藤掃部助を中心として
[5] 서적 信長・秀吉と家臣たち
[6] 서적 大判ビジュアル図解 大迫力!写真と絵でわかる日本の城・城合戦 西東社
[7] 서적 戦国時代人物事典 学習研究社
[8] 문서 筒井定次
[9] 웹사이트 大川村の文化財 https://warp.da.ndl.[...] 国立国会図書館WARP 2020-03-03
[10] 뉴스 "資料見聞-織田信長朱印状 筒井順慶宛 個人蔵」『高知県立歴史民俗資料館だより・ 岡豊風日(おこうふうじつ)』第108号、2019年11月 1日発行" https://warp.da.ndl.[...] 国立国会図書館WARP 20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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